추억은 대체적으로 아름다워요. 분명 힘든 현실이였는데, 현재가 과거가 되면서 추억속에서의 기억은 현실보다 훨씬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저는 26개월의 군대 생활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구타 한번 당한 적도 없었고, 보직도 아주 편한 것이였고, 병장을 달아도 후임이 없었지만 괴롭히는 고참도 없었습니다.
군대 생활의 대부분을 소속된 부대와 떨어진 '격오지'에서 생활을 했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장교 한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아저씨라고 부르는 '다른 부대'사람들이였습니다. (당연히 이등병보다 병장이 높지만, 그런 위계질서는 군법에서 문제를 삼지 않는한 같은 사병 사이에서는 자기 중대의 고참만 고참이고, 다른 중대 사람이라면 그냥 아저씨로 통합니다)
물론 열명 남짓 제가 소속된 부대사람들이 순환 파견을 와서 생활했긴 한데, 그나마도 3개 중대가 돌아가며 2~3달 교체 주기로 온 탓에 실제 고참과 후임이 있는 군생활을 한건 1년에 1/3남짓이였습니다. 거기에 30명 정도되는 격오지 근무자 중에 유일하게 저만 고정으로 그곳에 있는 사람이라서, 장교라고 하더라도 몇달에 한번 오는거니까 그곳에 살고 있는 제게 물어봐야 할 것도 많고, 도움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으니 잘 대해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외롭긴 했습니다. 심지어 공중전화도 없는 곳이였거든요. PX도 당연히 없죠. 대체로 낙오된 지역의 산장지기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군대를 제대한 뒤에 떠올리는 군대에 관한 기억은 대체적으로 괜찮았습니다. 낭비된 시간이야 이루말할 수 없는건 사실이지만... 아무튼 어젯밤 꿨던 꿈이 숨어 있던 지난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사실 저도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 참, 신기한 일이네요. 제가 늘 군대에 대해서 떠올리는 생각들, 하는 말들은 좋은 기억 뿐이였는데, 제 무의식 속에는 안 좋은 기억 역시 차곡차곡 저장해놓고 있었나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편한 군생활을 하게 된건 일병이라는 계급을 단, 입대 후 6개월 이후 시점입니다. 훈련소의 7주를 빼면, 대충 4개월 정도의 이등병 계급동안 보통 사람과(!) 같은 군 생활을 했었는데요. 이등병이라는 계급을 달고 지내는 4개월은 참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입니다. 아마 군대 생활을 꽤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그랬을거에요.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심지어 목숨까지 끊는 안타까운 일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아무래도 정신적인 고통은 훨씬 클 것 같아요. 구타라고 해도 맞아서 아픈 고통보다는 모멸감, 공포 등의 감정의 영향이 훨씬 클테니까... 특히, 낯선 곳에 공포. 이방인처럼 혼자 들어선 이등병이라는 존재에 비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곳이 익숙한 고참들이니까요. 하루 종일 눈치를 보는 생활이 계속됩니다. 늦지 않을까, 잘못하는게 아닐까, 누군가 부르지 않을까, 이렇게 해도 될까, 말 실수를 하지 않을까... 등등...
혹시 얘땜에?
어제밤에 그 이등병 시절의 꿈을 꿨습니다.
생전 안꾸던 군대 꿈을 정말 리얼하게 꾼게 이해가 잘 안되는데, 문득 이 글을 쓰려다 생각해보니 어젠 제가 전역한지 정확하게 6년째 되는 날이였습니다. 그게 연관이 있을까요?
아무튼 꿈속에서 저는 이등병이였고, 위에서 말한 그 눈치보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등병 시절에 중대 고참 중에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형제-친구가 입대하면 같은 부대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공식 프로그램 같은 것도 운영되고 있는걸로 아는데, 당시만해도 쌍둥이가 같이 입대하면 같이 지낼 수 있도록 한 부대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쌍둥이 고참들이 둘 다 약간 짖꿎은 사람이였던거죠. 악의가 있었을 것 같진 않고, 약간 거칠면서 장난치는걸 좋아했다고 할까요.
사회에서 만났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사람이지만, 친구로 만났다면 오히려 재미있어 했을 사람이지만, 군대에서 고참으로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다른 고참들과 사이가 비교적 좋았던, 소위 빠릇빠릇했던 이등병이였던 저는 그 쌍둥이 형제를 대하는게 가장 힘든 일이였습니다. 또 그리고 약한 정도의 틱장애(Tic Disorder)가 있는 다른 한 명의 고참도 있었는데, 아직 이름이 기억날 정도로 제게만 유독 못되게 대한 사람이였어요. (사실 틱장애는 그때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어제 꿈에서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시간의 연속이였죠. 꿈을 꾸다 너무 힘들어서 깼을 정도입니다. 일어나자마자 손을 뻗어 아이팟 터치로 그 셋의 이름을 검색했습니다. 솔직히 쌍둥이의 이름은 꿈을 꾸기 전에는 한참 떠올려도 생각날까 말까할 정도로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인데 꿈을 꾸고 나니 명확하게 기억이 나더군요.
심지어 그들과 이등병의 계급을 달고 못하는 축구도 했습니다. (헉...) 덕분에 아직까지도 약간의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요. 도대체 왜 그들은 어젯밤 제 꿈에 나타나서, 제 아름다운 군대의 기억을 '힘든 현실'로 바꿔버린걸까요? 그나저나 지금은 정말 다들 뭐하고 있으려나.. 알고 있는건 이름 뿐인데, 그나마 이름이 평범해서 검색에선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에서 구독하세요
댓글을 남겨주세요
커헉. 리얼리?
거의 완전 선택 받은 군생활이었군요.
전 상근(방위)이었고 px병이었음에도 아주 소위 말하는 국어사전에도 있는 좆같은 군생활을 했었죠. 상근(방위)의 좋은점은 휴일날 출근안해도 된다는 점 뿐이었었죠.
전 제대한지 얼마안되서 현역과 같은 2년 군복무를 마쳤죠.
예전이 부러웠습니다. 예전 방위(상근)는 1년 6개월만 하면 끝이었고 대신 돈은 하나도 안줬죠. 악폐습이야 그 때가 더 좆같았겠지만.
저 또한 지금도 가끔 군생활의 좆같은 시간이 떠오릅니다. 가끔 군과 관련된 악몽도 꾸고. 생각하기 싫은데도.
아마 평생 이러겠죠.